요가를 오래 하다 보면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마음의 뿌리를 흔드는 질문들이 고요히 솟아오른다.
“나는 누구인가?”
“이 숨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의 의식은 몸과 분리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품는 순간, 우리는 단순한 아사나 수련자가 아니라 철학자가 된다. 요가 전통에서는 이 과정을 타르카(Tarka)라 불러왔다. 흔히 “명상”이라고 번역되지만, 그 뜻은 훨씬 넓고 깊다. 단순히 눈을 감고 고요히 머무는 상태를 넘어서, 질문과 사유 자체가 곧 명상이 되는 특별한 길이다.
타르카는 산스크리트어로 “논증, 추론, 사고”를 뜻한다. 그러나 요가 철학에서 타르카는 단순한 논리적 사고를 넘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내적 성찰이다. 고대 인도의 현자들은 늘 질문에서 출발했다. 베다 시대의 불 속에서 제물을 태우며 던졌던 “나는 누구인가(कोऽहम्, Ko’ham)?”라는 물음은 지금까지도 울림을 남긴다. 타르카는 그 질문을 붙잡아 흔들어 보고, 끝내 흔들리지 않는 진리에 다가가는 과정이었다.
고대 경전 《우파니샤드》는 수행의 단계로 “경전의 가르침(śruti), 사유(tarka), 내적 명상(nididhyāsana)”을 제시한다. 스승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는 해탈에 다다를 수 없으며, 반드시 자기 안에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체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타르카는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지혜(vidyā)를 자기화하는 중간 다리였다. 지식으로 머물던 것이 사유를 통해 깨달음으로 변하는 것이다.
8세기 베단타 철학자 아디 샹카라는 “타르카 없는 수행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다”고 말했다. 스승이 전한 가르침을 곱씹어보지 않고 곧바로 명상으로 들어가는 것은, 기반 없이 공중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이후 베단타 전통은 슈라바나(聽聞) → 마나나(思惟) → 니디드야사나(명상)의 과정을 강조했는데, 그 중심에 바로 타르카적 사유가 있었다. 의심과 질문이 없는 명상은 결코 깊어질 수 없다는 통찰이었다.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에는 ‘타르카’라는 단어가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비차라(vicāra, 사유적 집중)의 단계에서 그 정신이 드러난다. 요가에서의 명상은 단순히 생각을 지워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 가지 질문에 마음을 집중시켜, 그 질문이 진리로 향하게 하는 과정이다. 결국 그 집중이 깊어지면 생각조차 초월하게 된다. 이때 타르카는 비판적 성찰을 통한 명상으로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현대 요가 수련자에게 타르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매트 위에서 우리는 흔히 이런 의문을 마주한다.
“왜 내 어깨는 풀리지 않을까?”
“왜 어떤 날은 호흡이 깊고, 어떤 날은 얕을까?”
“내 마음은 왜 늘 과거와 미래를 오갈까?”
이 질문들을 무시하지 않고 끝까지 응시하는 것, 그것이 곧 타르카적 명상이다. 아사나가 몸을 열고, 프라나야마가 호흡을 정돈한다면, 타르카는 의식의 문을 여는 열쇠다.
타르카는 단순한 명상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를 향한 질문 그 자체가 곧 명상이 되는 길이다. 요가의 길에서 질문은 결코 장애가 아니다. 오히려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다.
임은주쁘라나요가에서 수련하는 이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오늘의 호흡 속에서 작은 질문 하나를 붙잡아 보라.
“나는 누구인가?”
“이 숨은 어디에서 오는가?”
“무엇이 나를 자유롭게 하는가?”
그 순간, 질문이 명상이 되고, 당신의 수련은 철학이 된다.
기자:임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