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8-10-16 09:37:41
기사수정



20여 년 전 인도 비하르 요가학교로 유학을 떠났던 필자는 인도의 풍경이 혼돈 그 자체였다.

오늘 하루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근댔고, 늘 새롭고 다른 하루였다.

그 속에서 옴 샨티라는 평화의 만트라를 깨달았다.

옴 샨티는 혼돈으로부터,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나를 보호하고, 회복시키는 만트라다.


내 인생에 변곡점이 있다면 20여 년 전 인도 비하르 요가학교로 유학 가기 위해 집을 나선 바로 그때가 아닌가 한다. 긴 비행시간 뒤 마침내 도착해 낯설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바라본 델리공항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이건 공항이 아니라 거지들의 숙소 같았고, 수많은 인력거 인과 공항에 나온 색색의 사람 들로 아수라장 같았다.


이런 풍경이 가능하다는 것이 놀라워 눈이 있는 그대로 크게 떠졌다. 거리 또한 거지와 동물,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 어디를 밝고 다녀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그런 인도의 첫 모습은 우습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나를 불안하게도 했다. 한마디로 인도의 풍경은 혼돈 그 자체였다.

여러 일들로 앞길이 막막했던 20대의 젊은 나를 그간의 삶에서 빼내 더 큰 혼돈 속으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인도는 내게 드라마틱한 삶 그 자체였다. 기숙사에서 일어날 때마다 오늘 하루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근대던 하루, 인도에서의 하루는 늘 새롭고 다른 하루였다. 학교에서의 하루는 새벽 아사나 수업으로 학생 일과가 시작 되었다. 그리고 짜이를 마시는 티타임이 있고 맡은 구역의 청소를 하고, 아침식사를 하고 나면 오전 수업이 시작되었다.

오전 수업은 주로 이론 수업으로 요가철학과 요가심리학, 요가생리학에 대한 내용들로 구성되었다. 오전에는 이론시간, 오후에는 실습시간으로 짜여 있었다. 점심 후에는 요가니드라 수업과 호흡과 명상수업, 아사나 실습시간으로 이어졌다.

하루 동안 모든 수업에는 만트라 챤팅이 이루어졌는데, 짧은 만트라에 아름다운 운율을 얹어 노래하듯 합창하는 그짧은 시간을 나는 참 사랑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와미 (요가 수행자)인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아름다운 음률의 만트라를 부르며 수업을 시작하고, 수업을 마무리하며 함께 만트라를 부르면 이것이 천국인가 싶었다. 만트라로 수업이 시작되고 만트라고 수업을 마치며 한 수업에서 한 수업으로 이어져갔다. 모든 만트라 끝에는 옴 샨티 샨티 쌴티히(Om Shanti Shanti Shantihi)’하며 마침표를 찍듯이 샨티 만트라(Shanti Mantra)를 불렀다. 선생님들 대부분이 평상시에도 어떤 말 끝에 옴 샨티 (Om Shanti)’하기도 하고 글의 끝에도 '옴 샨티'라고 적었다. '옴 샨티'란 말은 내가 전혀 모르고 존재하지도 않던 말이었는데, 이제는 어디에나 있는 말이 되어버린 듯했다. ‘샨티란 말은 평화를 의미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선생님들은 항상 평화를 노래하고, 평화를 기원하고, 평화를 축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중요 하지 않던 무엇이 내게 중요하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전쟁으로 분단된 나라에서 자란 나는 평화라는 말은 전쟁의 반대말이었다. 인도는 전쟁을 겪은 나라도 아니고, 전쟁이 일어날것 같은 나라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평화는 뭘까? 마음의 안정 같은데, 마음의 안정이 평화가 맞을까? 샨티의 의미에 대해 스와미 지께서 삿상(Satsang)시간에 여러 이야기를 하시기도 했는데 여하튼 인도에서의 유학생활은 재빠르게 지나갔다. 그 의미가 무엇 이든 내 삶에서의 마음의 안정은 내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 어서, 외부환경과 요인에 더 크게 좌우되는 것 같았다. 외부환경이 쉴 새 없이 나를 몰아대는 터에 그때마다 어떻게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을지 반항심이 생기는 날도 많았다. 그런 내 마음과 다르게 인도에서 다녀온 나는 샨티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습관 적으로 자주 사용하고 있었다. 어떤 습관이 몸에 배듯 그 말도 내마음에 배어버린 것 같았다. 비록 그 의미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고 수긍할 순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심지어는 뱃속에 있는 아이의 태명까지 샨티라고 지어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샨티라는 말은 내가 습관적으로 자주 쓰게 되는 말이 되어갔다. 평화, 평안, 평온, 평정을 삶에서 바라는 것은 내 삶에서 정말로 절실한 일이 없는데도 내 마음은 그다지 절실하지는 않았다. 나를 위해 스스로 축원하듯이 동심 같은 마음이 자라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오랜 기간을 평화롭지 않은 상황에서 지내야 했다. 우리 집은 자주 전쟁터가 되었고, 나는 그 전쟁터 같은 집에서 불안하고 위태로운 마음을 견디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실은 날마다 불안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마음을 졸이고 견디어야 하는 하루하루들 말이다. 그런데 젠장! 평화가 어디, 있을법한 소리인지, 그게 가능하지도 않아 보이는 절망의 날들이기도 했다.

평온과 평화로움, 평온이 내 삶에서 너무나 절실했지만, 꿈같은 이야기 같았다. 오히려 평온한 며칠을 보내고 나면 무슨 일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평화로운 순간 더 커졌다. 평화로운 순간에도 마음 놓고 평온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평화로우면 무언가 편치 않은 느낌, 실은 그래서 쉽게 평온할 수 없었다. 이제는 그런 나의 오랜 과거에 대해 옴 샨티하며 위로해본다. 옴 샨티는 평화의 만트라이다. 어떤 혼돈으로부터, 어떤 불안으 로부터, 어떤 불안정한 상태로부터, 어떤 갈등으로부터, 어떤 파괴적이고 불만족스러운 상태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만트라이 다. 그런데 그러한 실은 상황은 날마다, 순간마다 일어난다. 내 안정이 내 평온이 방해받는 순간들 말이다. 누군가에 의해서 무언가에 의해서 어떤 상황에 의해서 내 안에 생각들과 마음들로 인해 서... 평온함이 죽 이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무언가가 늘 우리를 불안정하고 불균형한 상태로 되돌려 놓기 때문이다.

그 어떤 안정도 순간적인 것이다. 그 순간이 조금 더 길고 짧고의 문제도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해내는 능력이다. 그 능력은 마치 오뚝이가 외력에 의해 쓰러지면 바로 탄성으로 일어나듯이 내 안에 자리 잡아야 하는 탄성력이다. 왜냐면 우리는 순간순간 방해받고 쓰러지며 평정을 잃어버리니까 말이 다. 한번 평온해졌다고 해서 이 지속력이 영원하지 않기에 지속되 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평온으로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야 할 일이다. 내 평온이 쓰러지는 순간, 마음의 안정이 무너지는 순간 얼른 해야 하는 탄성적인 만트라가 옴 샨티이다.

매 순간마다 옴 샨티를 놓지 않고 있다면, 강력한 탄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무너지는 순간, 넘어지는 순간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 그 강력한 힘을 매일 연습하는 것이 옴 샨티라는 만트라이다. 그래서 이 만트라는 매우 강력하고 힘 있는 내면을 기르게 한다. 어떤 상황이나 어려움, 관계 속에서 깨어진 평온으로 재빠르게 돌아오는 능력 말이다. 이 평온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평온으로 되돌아오는 내면의 힘을 기르는 일, 그 탄성력은 분명 삶을 더 건강하게 만들고, 덜 갈등하게 만든다. 이 힘을 익힌 사람은 비로소 삶에서 유연한 물고기처럼 헤엄칠 수 있으며, 서핑하듯 삶이라는 파도를 탈 수있으며, 삶에서 오는 모든 씨줄과 날줄의 바늘에서 안전하게 자기를 지킬 수 있다.

옴 샨티는 나를 보호하는 만트라이자, 나를 세워주는 만트라, 나를 회복시키는 만트라이다.

옴 샨티 샨티 샨티히’....


writer 차승희(차승희심리요가연구소 대표)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newstherapy.co.kr/news/view.php?idx=816
관련기사
최신기사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